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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이야기/리뷰

뮤지컬 어쌔신 : 오늘 우리가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대선 전에 쓰고, 지난 12/16일, 팟캐스트 '스튜디오뮤지컬 자리주삼'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소개했던 글. 이제서야 씁쓸한 마음 안고 올려본다.


대선주간

뮤지컬 어쌔신 : 오늘 우리가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2012년 연말은 유난히 분주하고 시끄러운 일도 많다. 그 중에서도 굵직한 일 하나가 역시 대통령선거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국민들의 정치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는데, 국민의 정치적 관심과 한국의 대선을 이 뮤지컬 속에서도 발견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가져와봤다. 뮤지컬 어쌔신!

뮤지컬 계의 두 거장 하면 작곡가로서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스티븐 손드하임을 꼽는다. 영국에 웨버가 있다면 브로드웨이에는 손드하임이 있다. 손드하임은 작사 작곡 모두가 가능한 천재 작곡가이자 예상치 못할 독특한 선율의 흐름, 즐거운 쇼가 아닌 연극적 접근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다룬 예술성 짙은 작품을 많이 했다는 점 등으로 유명하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2분화 해서 얘기하고 싶진 않지만 웨버와 구분 짓는다면 예술성에 가깝다는 뜻이다.

 

손드하임의 걸작 중 하나가 바로 1990 12월에 미국 Playwrights Horizons에서 초연된 뮤지컬 어쌔신(Assassins: 암살자들)’이다. 브로드웨이에는 13년만인 2004년에 입성했는데 어쌔신은 이때 토니어워즈 5관왕, 드라마데스크[1] 4관왕을 석권했다. 제목처럼 미국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시도했던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점이 당시에도 지금도 쇼킹한데, 특히나 영웅주의가 대세이던 미국사에서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니 그 용기가 더욱 가상하다.

 

이 작품에는 총 9명의 이상한암살자들이 등장해 저마다의 이유로 대통령을 쏜다. 어떤 인물은 알 수 없는 복통의 원인을 대통령에게 돌리며, 또 어떤 인물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배우에게 주목받고 싶어서, 험난하게 살다가 급진주의자가 되면서, 가난해서,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 시대의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시도했다. 관객들은 아홉 암살자들의 총성소리뿐 아니라  그들의 삶과, 암살을 결심할 때의 마음, 세상을 향한 외침 등을 한 자리에서 보고 듣게 된다.  9명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지는 작품 속에서 이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만나고 이야기도 주고 받는다. 물론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뚜렷한 사연으로 무장한 캐릭터들은 모두 주인공이지만, 때로는 행인이 되기도, 친구가 되기도, 또는 전체를 관장하는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공연 때마다 호평과 함께 혹평도 동반했다. 2004년 브로드웨이에 처음 입성했을 때에는 손드하임 특유의 낯선 곡 진행과 충격적인 주인공들, 게다가 그들의 조우를 두고 부정적인 평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국내의 경우 올해로 세번째 재공연되는 어쌔신을 두고 혹자는 인내심을 요하는 작품이다.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는, 작품의 지적 폭력성을 느꼈으며 상상력과 리얼리티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배경지식에 대한 사전조사는 지적 폭력이 아니라 라이선스 수입공연을 대할 때의 기본예의가 아닌가? 뮤지컬은 머리로 드라마를 따라가는 이성작용뿐 아니라 노래, , 무대 전체를 느끼고 감상해야 할 종합예술이므로 관람 전 미리 프로그램을 읽고 들어가는 것, 공연 배경지식을 알고 가는 게 즐겁게 관람하는 현명한 자세이다.

지루했다는 일부 반응은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뮤지컬임에도 춤이 없고 독백형 대사도 많으니까. 아마도 이 뮤지컬을 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뮤지컬은 느끼고 연극은 사색한다는 말도 있는데, 이 뮤지컬은 독특하게도 사색하는 뮤지컬이다.  뮤지컬스러운 뮤지컬, 가 아니라 손드하임 특유의 무게감이 가미된 연극성이 강한 뮤지컬이다. 더불어 가상과 현실이 얽히고 섥힌 점은 작품의 무게감을 덜어주는 긍정적인 요소였던 것 같다.

 

어쌔신은 흥행하는 뮤지컬들처럼 신나고 화려한 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뮤지컬이 꼭 오페라의 유령같이 웅장 화려하며 오페라틱해야 하거나, ‘김종욱찾기처럼 아기자기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주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로맨틱 코미디 아니면 웅장하고 화려한 대형 라이선스가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어색할 수 있으나 관객취향의 다양성, 뮤지컬 장르의 내적 다변화를 위해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어쌔신’. 언뜻보면 범죄자들의 항변극 같다. 제목과 주인공만 보면 정치적 선동으로 오해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타이틀이 암살이며 암살이라는 스토리가 극을 이끌어갈 뿐 이 공연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은 암살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있다. 연출 및 귀토 역을 맡은 황정민도 프레스콜 인터뷰에서 왜 대통령을 죽이려 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하는 과정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누가 한 번 그들에게 손내밀었더라면 그들의 선택이 달라지지는 않았을까라는 등의 언급을 했고, 극 중 오스왈드 역을 맡은 최재림 배우도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네가 원하는 것? 그건 다른 사람들이 널 사랑해 주는 거야. 맞지?(부스의 대사)”와 같은 인물들의 대사를 들어보면 이들이 기억되고 싶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렇다. 이 작품에서 암살자들은 자신의 패배의식으로 아무 상관없는 대통령을 죽이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을 소외시킨 사회를 향해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게다.

 최근 들어 묻지마 살인이나 주폭이 늘어나고 정신분열증 환자가 늘어나며 취업이 안 되고 실직하며 점점 가난해지는 이 사회에서 이것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면, 당신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그 마음이 향하겠는가.

마침 대선이 코앞에 닥쳤다. 그런 의미에서 투표를 꼭 하자. 극 중에서 새뮤얼 비크가 자신이 뽑은 대통령을 떠올리며, ‘난 정말 어이가 없어. 내가 널 찍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 라며 혼잣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번에는 정이 가는 사람 찍지 말고 꼼꼼이 그 후보가 살아온 길과  그의 정책들을 보고 마음을 정하자. 뽑고 대통령 욕하지 말고 잘 뽑고 잘 선출해서 박수 좀 쳐주자.



[1] 2012년에 57번째 어워즈를 개최한 매년 열리는 미국의 메이저 시상식. 브로드웨이, 오프브로드웨이,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제작된 극장공연작들을 대상으로 한다. 올해 outstanding musical상의 영예는 뮤지컬 원스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