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리며 - 여기에 영웅은.. 없다.
성웅 이순신. 그를 밑세상으로 끄집어 내린다면?
"신격화 된 이순신을 인간화 한다!"
이것이 발칙한 상상이 된 것은, 다시 말해 이순신이 신화화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박정희가 본인 정권 시절에 만든 완벽한 영웅서사시가 바로 이순신 이야기이다. 강인한 이순신과 비굴한 원균의 대립 구도 속에서 파시즘 담론의 윤리코드가 나온다.
이 영웅을 탈 우상화 하려는 시도는 그동안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모두 무색하리만치 실패로 끝났고, 이순신 이야기는 유토피아적 담론으로 우리를 꾸준히 찾고 있으며 국민 모두는 이순신을 세종대왕 다음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이순신을 평범한 자리로 끌어내린 용감무쌍한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가 대학로에서 롱런 중에 있다. 이 작품 속 이순신은 대중들에게 새로운 이순신 상을 인식시켜줄 수 있을까.
드라마 허준 이후 역사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요구에 맞게 재창안하고 계몬주의 드라마로 만들어내곤 한다. (점점 그 정도가 심기가 불편한 수준이며, 퓨전사극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정도도 심각해지고 있다.)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도 주로 계몽주의나 희망적 유토피아의 이야기로 꾸며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름'을 내세우고 있는 '영웅을 기다리며'에서의 이순신은 과연 어떤 점이 다를 것인가.
이 작품은 난중일기에 누락돼 있다는 3일 간의 기록을 상상력으로 채워낸 이야기이다. 3일 간, 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었다는 설정으로, 배고프면 서럽고 열 받으면 욕도 잘하며 고구마 하나에 목숨을 구걸하는 가 하면, 최신 유행음악에 맞춰 셔플댄스까지 선보이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이순신을 그려낸다. 포스터의 카피를 보면, '본격 역사왜곡 코믹 액션 로드 블록버스터...'라며 대놓고 '역사왜곡'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현규 작가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스팸어랏을 보고 영감을 받아서 쓰게 된 거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스팸어랏에 있고 여기에 없는 게 있다.
둘다 가볍고 밝다. 하지만 스팸어랏은 촌철살인의 통쾌함과 고도의 위트로 꽉 채워지는 느낌이다. TV로 치면 SNL을 보는 느낌이랄까. 리듬의 완급 조절이 적절하여 쓸데없는 유머를 남발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의 밀도가 촘촘하다. 말의 코믹함을 잘 살려야 하는 만큼 배우의 역량이 절대적인데 그 표현도 오리지널 배우 및 2013년 한국공연의 배우들은 썩 잘해낸다.
반면 영웅을 기다리며는 좀 아쉽다. 말장난의 이어붙임이 많은데 개콘보다 재미없어 썰렁해지는 사이가 많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후루룩후루룩 바쁘게 녹음기처럼 대사를 이어가다보니 이야기 자체에 집중력은 떨어지는 듯 했고 '포르테 아다지오'로 흘러가 산만했다. 마지막에 막딸이 이순신에게 절을 올릴 때 막딸이 흘리는 눈물에 함께 공감할 수 없을 만큼.
이순신을 끌어내린 용감한 도전과 유쾌한 문법으로의 표현 시도는 박수치고 싶다.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논리보다 종교가 되어버린 이순신을 대하는 태도는 그만큼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치밀해야 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스팸어랏과 같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피눈물 나게 우리 대중 관객들을 연구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잘못 건드리면 안 된다.
박정희 정권이 완벽하게 영웅 서사시를 만들어 서울 한 복판에 동상까지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국민 성웅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다. 국민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며, 무작정 육두문자의 화음과 슬랙스틱 코미디로 망가지며 공격해오는 방식보다는 재해석이 담기는 쪽에 오히려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만약 그저 '웃자'는 주의면 '정-말' 배꼽 빠지게 웃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발군의 코미디나 애드리브는 아직 부족하다. 현 대본 위에서 웃기기 위해 배우들이 억지로 만들다 보니 작위적으로 느껴질 우려도 생긴다.
스팸어랏도 초연 때보다 이번 2013 버전이 더 사랑 받는 이유는, 과거 초연의 실패를 거울 삼아 한국 관객에 대한 이해를 돋우어 작품의 내용에 풍자와 메시지를 좀더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한국 대중의 마음을 염두에 둔 손질이 필요해 보인다.
팍팍한 전쟁같은 현실에 우리는 영웅을 기다린다.
하지만 슈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만화 속 영웅은 현실에 없다.
내 삶을 구원해줄 영웅의 목소리는 결국 내 가슴 속 깊은 소리에 담겨 있는 것 아닐까.
특출난 영웅을 기대하기보다, 평범한 내 안에서 또다른 ‘거북선의 기적’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평범한 우리의 전쟁 같은 일상에 파이팅을 외친다! 오늘 하루도 나는 충분히 영웅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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