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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이야기/상식

작가 이광수



춘원 이광수. 1892년 평북 정주 출생. 6.25 당시 납북되었고 1950.10.25 병사.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쓴 소설가로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은 <무정>, <흙>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논문과 시편, 희곡이 있다.

== 생애 ==
=== 유년기 ===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아버지 이종원과 어머니 충주 김씨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이보경이다. 춘원이라는 아호(雅號) 외에 고주·외배라는 별호도 있다. 5세에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8세에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으며 일찍부터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 집에 머무르며 심부름하며 생활하였다.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 일본 유학 ===
1905년 천도교와 관련된 일진회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타이세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생활을 하였고, 홍명희·최남선 등을 만나 사귀었다. 1906년 학비 곤란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1907년 다시 건너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이때 일본에서 만난 홍명희와 친하게 지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톨스토이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1909년 일어로 쓴 <사랑인가>라는 단편이 메이지 학원 동창회지인 《백금학보》에 발표되었다. 이광수가 완결한 첫 작품이며, 동시에 첫 친일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야마자키 도시오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를 주제로 쓰여진 친일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는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1910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 이승훈의 추천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고, 그해 최남선이 주관하는 잡지《소년》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그해에 1년 연하의 수원 백씨 백혜순과 결혼하였다. 1913년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조선을 떠나 상하이에 잠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무정》을 발표하여 최남선과 함께 신문학 개척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 독립 운동 ===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과 재혼하였다. 그해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여운형 선생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2월 백관수·최팔용·송계백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19년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하였고,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독립신문》주필로도 활동하였다. 상하이에 와서 그는 다시 홍명희를 만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귀국 후 이광수는 흥사단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1919년부터 그는 잡지 《독립》을 발행하였고, 사장 겸 주필이었고, 또한 임시정부 사료 편찬위원회 주임이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임시정부의 사실을 알렸으며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우수한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고, 출판부장으로 주요한을, 기자로는 조동호 등을 영입하였다.《독립》은 창간 후, 주 2~3회 발간하였으나 자금난이 심해지자 그는 1925년 18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이광수와 홍명희와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고, 2년 뒤인 1921년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그뒤 재정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던 이광수는 1923년 5월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유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할 것을 권고받았다. 이광수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들여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언론 활동과 사회 활동 ===
1919년경 아내 허영숙이 상하이에 이광수를 찾아왔을 때 아내와 함께 돌아오다가 (일설에는 홀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선천(宣川)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뒤에는 변절자로 비난받았다.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 그 뒤 1922년 9월 30일 밤에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첫 면담을 가졌으며, 그때부터 사이토의 정치참모 아베 미쓰이에와 빈번히 접촉하였고, 그들의 주선으로 월수당 3백 엔을 받는《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한다.
1922년 잡지《개벽》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하였는데,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이광수는 흥사단의 국내조직으로 수양동우회를 조직했는데, 그 전문(前文)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주의(主義)”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수양동우회에 대해 도산 안창호가 주장한 지덕체 삼육에 따라 점진적 개량되는 인간상과는 달리,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평범히 사는 유순한 인간상을 목표로 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동아일보》에 사설〈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일본의 국법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에 대해 일본의 국법이 허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는 논설이라는 비판이 있다. 뒤에 안창호와의 친분으로 1938년 안창호가 죽자 그의 장례를 주관하였다.
1929년 단종애사를 썼는데 대중의 인기를 크게 얻었다.
1931년 6월 26일부터 조선일보에 소설《이순신》의 연재를 시작하였다.

=== 친일 행적 ===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내고,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이 무렵에《사랑》,《세조대왕》등을 집필하였다.

1938년 3월 자신의 스승격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도산 안창호가 병사하자, 이광수는 커다란 충격과 실의에 빠졌다고한다. 이광수는 전향서를 발표하는등 이때부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게 된다. 주로 시나 소설을 통하여 하거나 아니면 강연을 하였다.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1939년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하면서 적극적 친일 행위에 나섰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광수('''李狂獸''')라는 빈축을 샀다. 또한 일본의 국민 총동원 계획에 참여하여 김용제(1909년)·최재서·김기진 등과 문인 보국회를 조직하고 소위 황도문화 선양에 노력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소위 내선 동포의 정신적 단결을 촉구하여 국민의무 완수를 목적으로 한다는 야마토 동맹의 조직에 가담하여 이사가 되었다.

작품으로는 <가끔씩 부른 노래>(39.2월)를 시작으로 <내선일체와 조선문학>(1940.4,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11, 국민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12, 국민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2,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1.18,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 광복 이후 ===
1921년에 결혼했던 아내 허영숙과는 1946년 5월 21일에 합의 이혼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13일자는 “장차 이광수가 전범으로 걸려들 때를 걱정하여, 자식과 재산의 보호를 위해서 취하는 잇속 빠른 길이 아닌가 보고 있다.”라며 비판하였다.
1945년 8.15광복을 보았으며, 광복 후에는 기념사업회의 권유로 안창호의 일대기인《안창호》를 집필했다. 1947년 김구의 자서전《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여 친필본 상권의 첫 문장 “우리 선조는 안동 김씨로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다.”를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로 고치는 등 여러 부분에 손을 댔다. 그 후 그의 친일 행적(태평양 전쟁 당시 문필 활동과 학병 지원을 요구하는 강연 활동으로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에 협조)이 밝혀져 1949년 2월 9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검거, 구속되었다. 이광수가 구속되자, 그의 셋째 아들 이영근(당시 중앙중학 6학년)은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위중하여 보석해주고 자신을 대신 담보로 수감해 달라.’라는 내용의 혈서를 써서 보냈다. 아들의 정성으로 이광수는 1949년 3월 4일 특별히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 무렵 《나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내었다.

그는 반민특위에 심문당할 당시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병상에서 납북되었다가 그해 10월 25일 사망하였다. 사인은 심한 동상과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였다. 그가 동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의 친구였던 홍명희가 김일성의 허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이광수는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사후 및 평가 ==
1957년 11월 23일 사상계사 주최로 '육당,춘원의 밤'이 개최되었다. 1959년 12월 '춘원선집'(광영사)가 발간되었다. 1963년 11월 '이광수전집'(삼중당)이 완간되어 13일에는 흥사단,삼중당 주최로 '이광수전집 완간기념강연회'가 열렸다. 1971년 10월 신선 '이광수 전집'이 간행되었다.

1991년 셋째 아들 이영근은 북한측 초청으로 입북, 부친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당시 총 103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어 친일 문학인으로 선정된 42인 가운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세력측은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35-36년을 살고 47세경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약 6년간을 친일로 살았다.”는 점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에 1909년〈사랑인가〉를 탈고한 시점에서 이미 친일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가 쓴 수많은 작품은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 갱생의 이상을 담고 있어 당시 청년층에 큰 감명을 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 외에 이광수는 사단법인 한국에스페란토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 문학 세계 ==
기독교 사상을 접하면서 이광수는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세례자 요한의 행위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했을 정도로 감동받았으며,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기독교 사상이 나타나 있는 예술론에 심취하여 이같은 기독교 정신을 자신의 작품 속에도 구현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1920년에《금일 조선 야소교회의 문젯점》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이광수가 당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조선 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 조선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너무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 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
# 상당수 개신교 목사들의 수준이 형편없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왠말이냐?
# 조선교회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 모두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조선에는 제 소리 하나 없이 다 가져온 것이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자주성)이 없다.
# 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졌다. 다양하고 자발적인 성서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 조선의 그리스도교는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조선의 대중들을 길들이려 한 기득권층적인 논설이라는 비판도 있다. 반대로 그의 작품에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송영옥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상이 깃들어 있지만, 그는 기독교 사상을 교리로서가 아니라,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고 고양된 정서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상하이로부터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면서 신문에 장편소설 《흙》 등을 발표하였다.


== 작품 ==

1916 와세다 대학 철학과 입학
1917 장편《무정(無情)》 단편《소년의 비애》
1917~18 장편《개척자》
1919《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주간으로 활동
1921 귀국하여 《동아일보》《조선일보》등에서 언론활동
1923~24 장편《허생전(許生傳)》
1924 수필집《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1924~25 장편《재생(再生)》
1926~27 장편《마의태자(麻衣太子)》
1928~29 장편《단종애사(端宗哀史)》
1930 소설집《혁명가의 아내》
1931~32 장편《이순신》
1932~33 장편《흙》
1933 장편《유정(有情)》
1934~35 장편《그 여자의 일생》
1935~36 장편《이차돈(異次頓)의 사(死)》
1936 장편《애욕(愛慾)의 피안》수필집《인생의 향기》
1936~37 장편《그의 자서전》
1937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
1938 장편《사랑》
1939 친일어용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 역임. 
        소설집 《이광수 단편선》시집《춘원시가집》
1940 장편《세종대왕》
1942 장편《원효대사》
1947 장편《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꿈》《나》
1948 장편《나의 고백》 수필집 《돌벼개》
1950 6.25 전쟁 때 납북, 만포에서 병사

== 가족 ==
처 : 백혜순(1918년 이혼)
처 : 허영숙(許英肅, 1946년 이혼)
셋째 아들 : 이영근
사촌형제 : 이학수(李學洙, 1921년 스님으로 출가)

< DAUM 검색, 인물DB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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