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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이야기/리뷰

(배리어프리공연) 장벽을 넘어서

월간에세이 9월호 게재.




장벽을 넘어서

고은령,  ㈜스튜디오뮤지컬 대표‧ 국내1호 공연큐레이터



매미 소리가 우리의 노랫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던 뜨거운 여름날 오후, 땀방울을 닦아내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객들을 맞이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덥석 내 팔뚝을 잡는다. “고 피디님 맞죠?” 6개월 전 우리 공연에 배우로 선발되어 공연에 참여했던 시각장애인 L씨다. 반가워 휙 돌아서서 인사하려는데, 그는 전에 없던 흰 지팡이를 들고 있고 색이 진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반기며 밝게 맞이했지만 이튿날까지도 L씨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L씨는 30대 초반의 잘생긴 청년이다. 몇 년 전 40도의 고열을 앓은 후 눈이 조금씩 나빠졌다. 눈이 침침해서 병원에 가보니 녹내장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고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 했단다. 작년 하반기만 해도 한쪽 눈의 시력만 낮은 상태라 대본을 확대 출력하면 읽을 수 있었고, 혼자 걷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한데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누군가의 팔을 잡아야 외출할 수 있다. 하루하루 다르게 보이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고통임이 분명하다.


나는 배리어프리(barrie free)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을 한다. 배리어프리 공연이란 ‘장벽(barrier)을 없앤(free) 공연’이라는 뜻으로, 장애인이 공연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 공연이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시각장애인에 집중한, 즉 청각을 강화한 공연을 만든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시작했다. 오디오극을 꾸준히 만들어 왔으니 하던 대로 하면 되겠거니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연발했다. 자리까지 직접 안내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공연장 입구에서 티켓만 나눠드렸더니 지팡이를 짚고 혼자 더듬더듬 무대 위로 올라가는 어느 관객. 그제야 얼른 뛰어가 안내해드렸다. 뒤이어 다른 관객이 예고도 없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가왔다. 공연장에 경사로도 휠체어석도 없는 탓에 그분은 다른 사람이 모두 입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장정 넷이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통과해 입장했고 간신히 무대 옆에 자리를 마련했다. 진땀을 닦고 안도하는 순간, 이번엔 안내견이 나를 보며 조용조용 다가온다. 흠칫 놀라 급히 안내견의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서 주인과 나란히 앉아 공연을 볼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나도 작품도 성장했고 보다 안정되게 공연한다. 하지만 늘 힘들다. 공연장 지침 탓에 안내견이 들어오지 못하기도 하고, 경사로나 휠체어석이 없어 불편을 겪는 장애인 관객들이 많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연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멋진 일 하시네요’라고 말해주지만 깊은 이해가 없다. 도와주는 봉사단체도 간혹 있지만 일에 대한 이해 없이 마음만 앞서 오히려 장애인 관객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도 생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있다가 ‘주어진 말’이 아닌 ‘하고 싶고 해야 하는 말’을 하겠다며 뛰쳐나와 시작한 게 지금 이 일이다. 이 재미난 공연, 내 인생을 바꾸기까지 한 공연이 밥이나 빵만큼 필요한 것임을 널리 알리고 싶다.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배리어프리가 아니라, 스스로 공연과의 장벽을 만든 분들에게 넓은 의미의 배리어프리 공연을 하고 싶다. 그러려면 더불어 같이 보는 공연 문화에 대해 알려드릴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왜 같이 봐야 하는지,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또 못 보는 이유가 뭔지 한 번만 생각해 준다면, 그 마음이 불씨가 되어 누구나 볼 수 있는 공연 문화의 인프라가 만들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