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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송이야기/방송자료

초량왜관 복원하자


2010년 2월 15일 부산전망대.  <초량왜관 복원> 관련 인터뷰 내용 정리.
- 연구자 및 인터뷰자 정예정.


 왜관이란?
왜관은 1407년에 설치되어 1872년 왜관 접수가 있기까지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의 포소를 중심으로 존치돼 왔으며, 조선의 대일정책인 교린체제를 전제로 조선시대 전 기간 조-일 상호 간에 외교와 무역을 이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특이 임란 이후에는 이 왜관이 부산에만 설치되게 되면서 부산포 왜관, 절영도 가왜관, 두모표 왜관시대를 거치게 되었고, 이후 오늘날 용두산 터를 중심으로 왜관이 옮겨 지어지면서 약 200 년 간 초량왜관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초량왜관은 조선 역대 왜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존치되면서 양국의 외교 및 무역소의 역할을 해냈으며 조선과 일본 상호 문화교류의 거점 역할을 하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이채로운 장소였다.

 전관거류지와의 구분

초량왜관이 들어섰던 자리에 일본 외무성에 의해 1872년 왜관점령이 일어나고, 전관거류지가 들어서면서 왜관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진 분들도 많다. 부산의 근대화를 논할 때마다 전관거류지를 떠올리게 되고, '일제에 의한 근대화'라는 콤플렉스가 용두산을 '뼈 아픈 근대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현장'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각인시키게 한다.

하지만 초량왜관과 전관거류지의 성격은 다르다. 왜관의 건축 및 운영은 모두 조선정부 주체로 이루어졌으며 정당한 교섭 없이 어떤 방법으로도 일본인들은 건축 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초량왜관은 '대마번 대 조선의 외교관계'를 표상하는 전근대적 산물로, 전관거류지는 '일본 외무성이 무단으로 대마번 왜사들의 거주지를 점령하고 설치'한 근대적 일본공관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초량왜관 복원의 의미

용두산 일대는 전근대에 동래부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기 때문에 왜인을 규제하기 위한 초량왜관이 들어서기에 적합했고, 이로 인해 약 200년 간 조선과 일본의 통상교역이 이루어지면서 조일양국의 문화가 교류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전관거류지가 들어서고 '타인에 의한 근대화'라는 질곡의 순간을 거쳤지만, 광복동 남포동 일대는 여전히 전근대의 역사적 명맥을 이어가며 각국의 다채로운 문물을 전달하고,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선보이는 국제적 문화도시를 꿈꾸고 있다.
 과거의 역사성과 항만을 배경으로 하는 교통 인프라, 부산국제영화제나 자갈치 축제 및 인근 영도와 송도간을 연계한 문화관광 인프라 간의 접점을 잘 찾아 조우하게 한다면, 가능성 있는 국제적 명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초량왜관의 면적과 건물 내용

사료에 따르면 초량왜관은 약 10만평 또는 11만평 규모였다고 한다. 사료마다 조금 다르게 기재돼 있는데 초량왜관은 주로 10만 평으로, 전관거류지는 주로 11만평으로 묘사된다. 이는 약 200여 년이라는 운영 시기르 ㄹ두고 왜관 터의경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이렇게 넓은 터전 위에 초량 돼관의 건물배치는 매우 짜임새 있게 이루어졌는데, 용두산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관수가(왜관 우두머리인 관수의 근무처), 재판가(재판왜의 근무처), 개시대청(우리나라 정부의 지정 무역상인이 시가를 평정하는 매월 3월8일에 개시가 되는)으로 구성된 동관 삼대청이, 우측에는 일본 사신의 숙소인 서관삼대청 육행랑이 배치되었다.
선창 가까이는 왜인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던 면가(면을 만드는), 조포가(두부를 만드는), 다다미가 등의 왜인 사사로이 지은 집이 지어졌다.

왜관의 관리를 위해 조선에서 설치한 관방 밖으로는 왜사가 숙배하던 장소인 초량 객사가 설치되었고, 통상교섭을 위한 연대청, 훈도별차이 집무소인 성신당과 빈일헌을 포함한 조선관아가 이웃하였다.



 복원의 범위

이렇게 200여 년이라는 존치기간과 많은 건물의 수, 그 터전의 방대함을 두고 보자면 왜관의 복원 범위를 확정하는 일도 쉬운 게 아닐 것이다.

먼저, 초량왜관의 터전 및 건축의 복원 범위를 확실하게 정해야 할 것이다.
- 초량 왜관 전체 (일본 측 건물과 조선 건물 모두)를 복원할 것인가, 아니면 주요 몇몇 건물에 집중할 것인가.
  양식 복원이 이르다고 판단되므로 경계와 건물의 터만이라도 복원할 것인가.

둘째, 어느 시간대를 복원할 것인가, 즉 시점의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 초량왜관이라고 하는 과거 200년 동안의 장소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것인가.
 아니면 용두산에 국한된 장소성을 부각하면서 왜관과 전관거류지의 관련성을 조망할 것인가.
- 용두산의 장소성을 주위와 연계해 과거의 역사와 현대의 도심 전체를 아우를 것인가....




건축 양식의 재현 가능성

초량왜관의 복원은 남겨진 유구가 극소해서 완전히 새로운 재료과 구축법을 사용해야 하므로 '재건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유적지 보존에 관한 국제적 기본 원칙인 '베니스 헌장'에는 추측에 의한 복원금지 특히 추정에 의한 재건축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 초량왜관에 대한 몇 점의그림과 도면 및 사진 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세부적 양식의 복원까지 이끌어내는 것은 다소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현재, 영국 등 유럽 국가에서는 역사적 건물의 소멸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느 ㄴ부분들에 대한 어떠한 첨가도 하지 않은 채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추정은 시민 개개인의 몫에 남겨두는 셈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냥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최근까지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연구 성과만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성급하게 양식의 완벽 복원보다는 용두산 일대의 시가지를 과거 왜관의 경계와 오버랩 하는 기초 작업부터 해야 한다.




10 만평이 넘는 초량 왜관 복원, 불가능하지 않나.

10만 평이 넘는 초량 왜관 전체의 복원을 단기적으로 접근한다면 복원의 목적- 대상 문화재의 진정성을 도출해내고 그 보편타당한 가치를 후대에까지 전한다는 - 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여러 건물군이 형성돼 있는 왜관의 경우 몇 동의 개별 건물에 대한 완벽한 복원이란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완벽한 왜관 건물의 복원을 이루겠다는 생각보다 복원 가능한 부분까지 복원하고 모르는 부분을 남겨둠으로써 장기적 안목으로 밑그림을 그려간다면 복원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 보자면 우선 용두산의 장소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고, 다음으로 건축물 복원의 시점과 관점 및 대상의 범위 설정 그리고 그것의 단계적 복원, 마지막으로 광복동 남포동에 산재한 근대문화 유산과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현대적 이미지와의 연계도 이어져야 할 것이다.



굳이 복원할 필요가 있는가.

가치 있는 문화유산에 대해 재평가 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조선의 통제와 경영 가운데 창건공사와 21 건의 수리공사가 이행되었던 초량애관은 분명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살펴보기 어려운 건축물이다. 특히 왜관 주변 성곽을 중심으로 내부에는 일본식 건물, 외부에는 한식 관아가 어우려진 이색적인 건축 공간이 형성된 곳이며, 일본 목수와 조선 목수가 같은 장소에서 수리 공사를 이루었던 곳이고, 자연스럽게 양국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게 된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대대적 규모의 복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초량왜관의 장소성이 재평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느 건물부터 복원할까?

그것은 어느 건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분은 왜관 내 대마도에서 파견된 우두머리인 관수가 거처하던 '관수가'부터 복원하자고 하고, 실제 통상교역이 시행됐던 '개시대청'이 중요하므로 이 곳부터 복원하자고 하기도 한다.

얼마 전 '왜관 복원 관련 2차 포럼'에서 부산대 김동철 교수는 한양을 제외한 지역 유일의외교 공간으로 '초량객사'에 중요한 의미를 뒀는데 왜관 운영이 조선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 의견이 타당한 듯 싶다.

초량객사는 임진왜란의 교훈을 되살려 일본인의 상경 자체를 막자는 취지로 왜관에 건축되어 조선국왕의 위패를 못두고 왜사들의 숙배식을 거행하게 한, 즉 조선의 통제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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