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 방송이야기/아나운서 비밀노트

오프더레코드 - 프롤로그


타다닥 타다닥.
8층 아나운서실에서 9층 보도국으로 갔다 다시 10층 라디오부스로 향하는 새벽의 내 걸음은 늘 쫓긴다.
5년을 꽉 채우고 저녁 근무가 지겨워질 무렵부터는 아침이슬을 맡게 됐지만 이 생활도 그리 즐겁지는 않다.

오늘도 4시부터 잠이 깨선 시계 확인하고 자기를 두세번, 5시 경이 되어 순서대로 울리는 알람소리 3종 세트를 짜증스럽게 끄고는 일어났다. 밥심이 최고라는 신념으로 기계적으로 차리는 아침밥상은 김치와 김 그리고 밥.
5시 40분이 되면 안전한 내 차에 올라 귀신 같은 쌩얼로 회사를 향한다.

뉴스를 앞두고 분장하는 내 손엔 느낌이 없다. 예전엔 한 시간 반이 걸리던 머리, 화장이 이젠 삼십분이면 뚝딱. 귀신머리가 정갈하게 올려지고, 움푹패인 눈가가 샤방해져도 이젠 설레지 않는다.
갑자기 뉴스 순서나 리드멘트 내용이 바뀌어도 긴장하지 않는다. '예~예, 바꿀게요~'
기자리포트가 나가는 동안엔 눈은 다음 원고를 보면서도,
'방송 끝나고  요 앞에서 차나 한 잔 마실까? 은행에도 가야 하지? 오늘따라 뉴스가 왜 이렇게 길어~...'
딴 생각이다.



그렇게 뉴스가 끝나고,
'수고하셨습니다-!' 5년 동안 똑같은 표정과 톤, 크기로 쳐다보지도 않는 주조를 향해꾸벅 인사를 하고는
30분 후에 있을 1라디오 시사프로를 준비하러 간다.
'하암~.'

오늘따라 생방 끝나곤 다음 주  걸 미리 녹음도 해놔야 한다.
녹음 분 방송에 여행작가가 패널로 나오셨다.
졸린 내 눈과 달리 그 분은 초롱초롱 빛났다.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마음껏 여행도 하고, 글을 쓰고 싶을 땐 글을 쓰고 이렇게 부수적으로 강의나 방송도 하시면서 참 자유롭게 사시잖아요. 스스로도 능동적인 삶이고,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꿈을 주시고. 참 행복한 직업을 가지셨습니다."

내 말에 그 분은,
"아나운서 님이 훨씬 부러운 직업이죠. 저는 자유로운 대신 항상 밥벌이 걱정이 따르고, 스스로 통제가 안 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어요. 여행이 일이 되면 몸과 머리가 아파지는 때도 많아요.

 하지만,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얼마나 멋져요? 저처럼 방송이 신기한 일반사람에서부터 각계 전문가들을 앉아서 다 만날 수 있고, 세상에 뉴스를 전한다는 그 중요한 일을 본인 입으로 하고 있으니 소명감도 크실 거고, 사람들에게서 존중도 받을 수 있고요. 열정적이고 능동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은 아나운서 같은 직업 아닌가요?
  제가 부럽다고요? 야- 그럼 바꿉시다!!"

맞아. 나, 이 직업을 얼마나 갈망했었나. 울릉도에서든 땅끝마을에서든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이크를 쥐어주는 곳만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이 한 몸 불사르겠노라 벽보고 외쳐댔건만.
이 직업을 위해 올해도 수 천 명이 간절한 마음으로 입사시험을 치르겠지. 지방의 '듣보잡' 아나운서인 나를 부러워 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감사해야 한다.
덜덜 떨면서, "KBS 9시 부산뉴습니다."를 외치며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부산 전체에 퍼뜨린 그 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카테고리에선,
지금껏 써온 뒷담화나 실수 내용 뿐만아니라
자신의 생방송이 마지막 스크롤 자막까지 순항하기를 바라는 방송쟁이들의 슬프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봐야 겠다.


여행작가처럼 자유롭게, 방송쟁이답게 열정적으로.




 - 고아나 Off the Record -

 

'2. 방송이야기 > 아나운서 비밀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운서에 대한 다섯가지  (1) 2010.07.28
아나운서는 휴가를 어떻게 갈까?  (3) 2010.07.28
피디와 기자의 차이  (0) 2010.07.24
나만 봐~~~  (2) 2010.07.20
아나운서 노이로제 5  (2) 2010.07.18